낙태문제 법적 규제만으로 해결 못한다
관리자
낙태문제 법적 규제만으로 해결 못한다
한국젠더법학회 세미나, 관련법 개정… 법·현실사이 괴리 좁혀야
연간 낙태수술 35만건… 사실상 한계 벗어난 '불법시술'
형사기소된 사건은 10건 미만… '낙태죄' 실효성도 의문
최근 낙태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뜨거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법률가들이 낙태와 관련한 처벌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젠더법학회(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27일 서울대 법대 서암홀에서 조희진 고양지청 차장검사의 사회로 ‘출산정책과 낙태규제법의 이념과 현실’ 등에 대한 학술세미나를 열고 이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젠더법학회는 주로 여성차별적 법제도 등을 연구하는 학술모임으로 현직 판·검사와 변호사, 법학교수 등 17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 “국내 낙태시술 95% 이상이 불법”= 이날 참석자들은 낙태여성 및 시술병원에 대한 엄격한 법적 규제만으로는 낙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사회·경제적 요인 등 낙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경우에도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해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좁혀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본인이나 배우자의 유전학적 장애나 질환 또는 강간에 의한 임신 등 5가지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이인영 홍익대 법대 교수는 “실제 구속력을 가질 수 없는 규범으로 국민들에게 낙태행위에 대한 금지인식을 가지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피임교육·피임약제에 대한 보험급여실시 등 사회적 안정망이 없고 임부와 아이에 대한 부조 등 국가적 차원의 지원책도 구비돼 있지 않는 상황에서 지켜질 수 없는 일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낙태규제법 개정을 통해 그 자체의 현실적응력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낙태를 불법으로 다스리기보다는 낙태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대한산부인과학회 대변인인 중앙대 의대 박형무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낙태수술의 95% 이상이 불법”이라며 “그러나 윤리적·법리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경우도 있어 허용한계를 엄격히 정하되 현실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이 시행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지난 2005년 전국 2,312개 의료기관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연간 낙태수술은 평균 35만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해 평균 출생하는 신생아 수인 45만명의 78%에 해당하는 숫자다. 또 미혼여성의 97.1%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미성년자 또는 혼전임신을 이유로 낙태수술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모자보건법 제14조가 정하고 있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에서 벗어난 사실상 ‘불법낙태’에 해당한다.
김은애 홍익대법학연구소 연구원은 “불법낙태를 결정하는 여성이 생명윤리에 대한 의식이 없거나 부족해서 또는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진정한 선택권’을 가진 상태에서 낙태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임신부의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낙태사유로 허용하지 않을 경우 필연적으로 불법시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미혼여성이 아이를 낳아 제대로 기르면서 자신의 삶도 잘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여건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 사회가 여성에게 불법낙태를 강요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한 낙태허용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지금처럼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범주 외의 낙태행위를 불법화하고 처벌하도록 한다면 여성들은 ‘음성화된 뒷골목’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낙태죄, 이미 사문화된 형벌규정”= 한편 그동안 형법상 ‘낙태죄’는 법조계에서 거의 사문화된 규정으로 여겨져 왔다. 이날 회의 참석자들도 대체로 여기에 공감했다. 매년 35만건의 낙태시술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서 실제 형사기소되는 사건이 10건 미만에 불과하다면 낙태죄가 현실적으로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대검찰청이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낙태혐의로 적발된 사건은 63건이며 이 가운데 86%가 혐의없음·기소유예 등으로 불기소처리되고, 단 9건만 기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에도 전체 적발건수 64건 중 단 9건만 기소했으며, 2005년에는 51건 중 3건에 대해서만 기소처리했다. 게다가 검찰이 기소했더라도 법원에서 징역 등의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사실상 전무했다. 2010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낙태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에서 1심 형사재판을 받은 5건 중 1건은 집행유예를, 4건은 선고유예판결을 받았으며 2008년에는 3건 중 2건이 집행유예를, 1건이 선고유예를 받았다. 2006년 1건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한 것이 유일했다.
◇ 외국, 대부분 합리적 범위에서 낙태 허용= 낙태가 합법적으로 수용되는 일정한 기한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입법한 국가는 미국의 각주와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이다. 이들 국가중 일부는 의사의 시술이라는 요건 외에 상담절차를 두는 것을 부가적인 요건으로 정하고 있다. 또 의학적 사유나 윤리적 사유에 의한 낙태는 허용기한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해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로는 스위스가 10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덴마크·이탈리아·룩셈부르크·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2주까지, 포르투갈은 16주까지, 노르웨이는 18주까지, 독일, 스페인은 22주까지 , 영국·쿠웨이트·대만 등은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법률신문/류인하 기자 acha@lawtimes.co.kr